<광복70년> 조영남 “해방둥이로 태어나 한판 잘 놀았죠”

<광복70년> 조영남 “해방둥이로 태어나 한판 잘 놀았죠”

입력 2015-07-14 10:57
수정 2015-07-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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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화가·작가·방송인으로 문화계 누빈 ‘괴짜’

‘해방둥이’ 가수 조영남(70)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 때 내려온 실향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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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 취하는 조영남
포즈 취하는 조영남 가수 조영남이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0년대 포크 음악의 산실인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첫발을 디뎠고, 1969년 번안곡 ‘딜라일라’로 데뷔해 46년간 노래해 온 짱짱한 현역이다.

가수뿐 아니라 화가, 작가, 방송인으로 문화계를 누빈 멀티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 앞에는 ‘괴짜’,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히트곡 몇곡 없는 가수·화투 그리는 화가로서, 젊은 날의 ‘바람기’까지 가감 없이 밝히는 방송인이지만 걸음을 뗀 곳마다 족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최근 강남구 청담동 조영남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오전부터 캔버스와 씨름 중이었다. 손에 든 붓과 크레파스가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쓱쓱 지나가자 음영(陰影)이 살아났다.

’연예인 집 중 가장 비싸다’는 집은 한 마디로 갤러리 같았다. 화투, 태극 문양이 담긴 그의 작품들이 거실벽과 바닥을 가득 메웠고 화초들이 즐비했다. 이달 새로운 전시회를 위해 큐레이터가 작품을 골라 갤러리로 옮기고 있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뿔테 안경을 쓰고, 붓을 잡은 채 그가 풀어놓은 70년 인생에는 시대의 크고 작은 줄기가 뻗어 있었다. 마치 거실의 큰 창 너머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물줄기처럼 거침없이 흘러온 듯했다.

”제 생년월일을 놓고 두가지 설이 있어요. 아버지가 주민등록증에 44년생으로 등록했지만 어머니는 해방둥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셨죠. 해방되자마자 갓 낳은 절 둘러업고 피신한 기억이 있으시다는 거죠.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전 어머니의 말을 적극 믿고 있어요.”

부모, 누나, 동생들과 함께 충남 예산군 삽다리로 피란 온 그는 중학교 때까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큰 누나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노래 재능은 고교 시절 우연히 알게 됐다. 큰 누나가 세들어 사는 집의 한양대생 누나가 “집에서만 노래하지 말고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추천했다.

그는 “고 2때 전국 성악 콩쿠르에 나갔는데 예선 탈락했다”며 “그런데 심사위원이던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날 부르더라. ‘노래를 너무 잘하는데 이탈리아어 발음이 이상하다.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물었다. 독학했다고 하자 고교 다니는 학비를 내주고 바리톤 조상현 선생한테 레슨을 시켜주더라. 1962년 장학생으로 한양대 음대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양대 1학년 때 약혼자가 있던 후배와 교내가 떠들썩한 연애 스캔들을 일으켰다. 중퇴한 그는 서울대 음대 성악과 64학번으로 다시 진학했다. 그러나 미8군 쇼에서 노래하기 시작하며 큰돈을 벌다 보니 자연스레 학교와 멀어졌다. 3학년 때 중퇴한 그는 한참이 흘러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명예졸업장을 받으면 졸업한 거나 마찬가지래요. 이력서에도 졸업이라 쓸 수 있는데 이후 이력서를 쓸 일이 없네요. 하하.”

미8군 쇼에 선 건 세시봉 무대 덕이었다. 그는 청년 문화의 메카라는 세시봉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노래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중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세시봉 ‘대학생의 밤’ MC이던 이상벽이 “게스트 차중락 씨가 아직 안 왔는데 노래할 사람 있느냐”고 물었고 친구들이 조영남을 추천했다. 조영남이 피아노를 치며 ‘돈트 워리 어바웃 미’(Don’t Worry about Me)를 부르자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 반향은 고정 출연으로 이어졌다.

그는 “출연료는 없었고 대신 세시봉 입장료를 면제받았다”며 “가끔 세시봉 사장님이 순두부찌개를 사주곤 했는데 그게 좋았다. 요즘도 같이 공연하는 윤형주, 송창식을 이곳에서 다 만났다”고 말하며 웃었다.

어느 날 동양방송(TBC) PD이자 세시봉에서 DJ로 활동한 이백천 선생이 그에게 미8군 쇼 오디션을 추천했다.

”서울대에선 장학금을 못 받았으니 등록금을 벌어야 했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노래하며 조금씩 학비를 벌었는데 집사가 ‘술 냄새가 난다’는 등 잔소리를 하니 자존심이 상해 취직을 하고 싶었죠. 강철구 선생의 쇼단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어요.”

정식 데뷔는 세시봉 식구였던 이백천 PD와 조용호 PD가 당시 톰 존스가 발표한 ‘딜라일라’ 가사를 번역해 오라고 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난 ‘딜라일라’란 곡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후다닥 집에 와서 번역한 게 지금 가사다. 그리고 (1969년) TBC ‘쇼쇼쇼’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하루아침에 진짜 가수가 됐다”고 기억했다.

연예계에 데뷔해 처음 만난 친구가 인기 가수 남진과 이상열이다.

”얘네들과 친해졌어요. 남진과는 이번 광복 70주년 특집 KBS 1TV ‘가요무대’에도 같이 섭니다. 우린 장르는 달라도 친했죠. 전 부잣집 아들 남진의 머스탱을 같이 타고 다니는 게 신났어요.”

걸출한 목소리로 벼락스타가 됐지만, 그는 노래 때문에 몇 차례 곤욕을 치른다.

1970년 부실공사로 붕괴한 와우아파트 사고를 풍자한 노래를 부른 후 강제 입대를 하게 된다. 그해 김시스터즈의 귀국 공연에서 ‘신고산 타령’의 가사를 즉석에서 바꿔 부른 게 화근이었다.

’신고산이 와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그는 “(최초 여류 변호사) 이태영 박사의 도움으로 구속을 면하고 입대를 했다. 그런데 그게 참 절묘하다. 내가 그때 얼떨결에 군대 갔다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면 지금 큰소리치고 살겠는가”고 웃었다.

육군본부 복무 시절, 그가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군 당국으로부터 요청받은 ‘황성옛터’ 대신 ‘각설이 타령’을 불렀다가 헌병대에 끌려갈 뻔한 일화도 유명하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1년에 한 번 육군본부 행사에 참석하는 박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란 오해에서였다.

그는 요즘 공연에서도 곧잘 ‘물레방아 인생’ 등의 노래 가사를 정치·사회 이슈에 빗대 부르곤 하는데 즉흥적인 개사는 일찌감치 능했다.

군 복무 시절 그는 미술에도 눈을 떴다. 이 시기 서울대 회화과 2학년이던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를 만난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민기는 조영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형이 그림을 그려야 해’라고 했다.

”미대에 놀러 가면 ‘이 정도 그림은 발가락으로도 그리겠다’고 툭툭 차고 다녔죠. 그걸 아는 김민기가 그림을 권유했고 이때부터 취미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미아리 (배우) 윤여정 네 집에 가면 난 하루 온종일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 김민기는 기타를 쳤죠. 반대가 된 거죠.”

김민기가 입대할 즈음 조영남의 작품이 쌓였다. 김민기는 전시회를 제안했고 서울대 미대 윤명로 교수에게 그림을 보여주자고 했다. “조영남, 넌 노래보다 그림 그리는 게 낫겠다”는 윤 교수의 호평에 그는 1973년 한국화랑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5년에는 세간의 화제 속에 윤여정과 미국 시카고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지만 그의 ‘바람’으로 1987년 이혼했다.

”이혼을 하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당시 미국에서 신학대를 나왔는데 그런 놈이 바람을 피워 이혼했다고요. 할 말도 없이 쫓겨났죠. 방송 정지는 아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대였으니 출연은 어려웠죠.”

그리고 1988년 그는 최대 히트곡인 ‘화개장터’를 발표한다. 1980년대는 영호남의 지역갈등이 최고조이던 시기로 이 노래는 지역 화합에 공이 큰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화개장터’의 작사·작곡가는 조영남으로 돼 있으나 김한길(새정치민주연합 전 공동대표)과 함께 만든 노래다.

”미국에서 알게 된 김한길도 이혼해 둘이 방 하나 얻어 하루하루를 보냈을 때죠. 어느 날 신문 쪽지를 내밀더니 ‘이걸 노래로 만들어야 한다’더군요. 경상도, 전라도 구분없이 사이좋은 화개장터에 대한 기사였어요. 이런 걸 불러야 의미가 있다기에 걔가 가사를 쓰고 전 기타를 치면서 곡을 만들었죠.”

이 곡은 조영남 앨범의 맨 마지막에 담겼지만 방송사에서 틀기 시작했고 널리 불렸다.

그는 “그땐 저작권 개념이 없으니 조영남으로 저작권을 등록했다”며 “다행히 김한길이 (배우) 최명길과 결혼해 잘살고 있어 한 번도 저작권료를 달라고 안 하더라. 평생 그 친구한테 죄지은 것 같다. 이 시대 한명회 같은 친구”라고 웃었다.

1989년 조영남은 KBS 2TV ‘자니윤 쇼’에 보조 진행자로 활동하며 방송인으로 대중적인 활동을 펼친다. KBS 2TV ‘체험 삶의 현장’ 등을 진행했고 지금도 MBC 라디오 간판 프로그램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DJ를 맡고 있다.

저서도 잇달아 출간했는데 2005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은 그에게 또 한차례 시련을 준다. 일본 우익성향 신문과 한 인터뷰가 그의 진의와 다르게 실려 ‘친일 논란’에 휩싸였고 졸지에 ‘매국노’가 됐다. 오해를 해명하고 공식 사과했지만 ‘체험 삶의 현장’ MC를 13년 만에 하차하는 등 방송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이쯤 되면 좌충우돌하다 못해 때론 아찔하고 위태롭게 보인 인생이다. 그러나 조영남은 ‘할배’의 나이까지 청년 못지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괴짜 DNA’는 세월에 녹슬지 않는 듯하다.

음반 발표에 게으르던 그는 지난해 신곡 ‘대자보’와 ‘쭉~서울’, ‘통일 바보’를 잇달아 발표했다.

올해도 ‘2015 세시봉 친구들’ 투어를 펼쳤고, 2007년 학력 위조 파문을 일으킨 큐레이터인 18년 지기 신정아와 손잡고 부천 석왕사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그는 지난 시간에 대해 “잘못했다는 건 느끼는 데 후회되는 일은 없다. 체질적으로 후회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한판 잘 놀았다. 후회 없이 재미있게 살았다”고 돌아봤다.

그는 마지막 길에 자신의 노래 ‘모란동백’이 불렸으면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 이유도 해학으로 풀어낸다.

”대한가수협회가 치러주는 장례식에 가보니 돌아가신 선배의 대표곡을 불러주더군요. 제가 죽으면 그 어려운 ‘딜라일라’나 ‘제비’를 무슨 재주로 부르겠어요. 천상 ‘구경 한번 와보세요’라고 ‘화개장터’를 부를 것 같아 미리 얘기해두는 거죠. 쉬운 ‘모란동백’을 부르라고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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