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 사살 당시 무장상태였다”

“빈라덴 사살 당시 무장상태였다”

입력 2013-07-09 00:00
수정 2013-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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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2011년 5월 2일 미국 해군특전단(네이비실) 요원들에게 사살될 당시 무장상태였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파키스탄 일간지 ‘돈’(DAWN) 인터넷판은 8일 빈 라덴 사살작전 과정을 조사한 파키스탄 정부 산하 ‘아보타바드 위원회’의 미공개 보고서를 봤다는 소식통 말을 빌려 이같이 보도했다.

신문은 “네이비실 요원들이 빈 라덴의 방에 갔을 때 그는 손에 무기를 쥔 채 선반에 있는 수류탄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나온 주장들과는 다르다.

한 네이비실 요원은 지난 2월 남성잡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이 침실에 서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총이 있어서 자신이 직접 그의 이마에 총알 두 발을 쏴 죽였다고 밝혔다.

반면 사살작전에 참가한 다른 네이비실 요원은 다음달 CNN 인터뷰에서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요원들의 맨앞에 서는 척후병이 빈 라덴 은신처 건물의 꼭대기 층까지 난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서 마침 침실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인물을 빈 라덴이라고 판단, 즉각 머리 부분을 사격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네이비실 요원 2명이 침실로 들어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빈 라덴의 가슴에 총격을 가해 생명을 끝냈다는 것이다.

신문은 아보타바드 위원회 보고서가 많은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서 빈 라덴 가족의 파키스탄내 은신과정도 소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2002년 알카에다 대원인 칼리드 빈 아타시를 체포함으로써 빈 라덴의 연락책인 아부 아흐마드 알 쿠웨이티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신문은 누가 아타시를 체포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알 쿠웨이티는 빈 라덴 가족이 2001년 10월 또는 11월 파키스탄 남부 항구도시 카라치로 이주했을 당시부터 함께 머물렀다.

빈 라덴 가족은 아타시가 체포된 이후인 2002년 중반 파키스탄 북서도시 페샤와르로 이주했다. 이후 빈라덴이 가족과 합류한다.

그러다가 빈 라덴 가족은 스와트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빈 라덴의 오른팔 겸 9·11테러 주모자인 칼리드 셰이크 무함마드가 빈 라덴 가족을 방문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2003년 3월 파키스탄 군사도시 라왈핀디에서 체포되자 겁먹은 빈 라덴은 가족과 함께 북서부 카이버 파크툰크와주(州) 하리푸르 타운으로 또 이동했다.

빈 라덴과 가족이 하리푸르 타운에 머물 동안 알 쿠웨이티는 아보타바드에 택지를 구입, 주택건설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후 가족과 함께 아보타바드 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빈 라덴은 네이비실 요원의 작전으로 사망했다.

신문은 아보타바드 위원회가 ‘제2의 5월 2일 (미군) 작전’을 피하고자 하는 파키스탄 정부에 조언을 했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위원회는 또 파키스탄내 첩보망을 구축한 수많은 미국 정부 계약자의 비자발급 상황을 조사할 것을 파키스탄 정부에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는 빈 라덴의 파키스탄내 은신과 관련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를 규정했는지 여부는 불명확한 것으로 봤다고 신문은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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