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의 방방곡곡 삶] 아이들의 사랑과 인내

[김주대의 방방곡곡 삶] 아이들의 사랑과 인내

입력 2021-02-16 20:02
수정 2021-02-17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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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갑자기 어묵 국물이 먹고 싶었다. 신월동 복개천에 어묵과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어서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만취해서 들어온 나를 보고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며 어묵 국물을 내놓으셨다.

초등학생 여자아이 셋이 어묵을 먹고 있었는데 가운데 아이는 먹지 않고 양쪽 아이들만 자신 있게 어묵을 건져서 먹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화가 났다. 셋이 나란히 서서 한 아이가 먹지 않는데 양쪽 아이들은 맛있게 먹고 있는 무참한 장면이라니. 양쪽 아이들이 얄미웠다.

국물이라도 좀 떠서 주지 나쁜 녀석들. 아주머니도 나의 모난 눈빛과 어두워진 얼굴을 보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포장마차 안의 침울한 분위기를 깨며 가운데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얘야, 너도 먹어. 아저씨가 사줄게. 아저씨 돈 많은 거지야. 자자, 얼른 먹어.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어.”

“저어…. 괜찮은데요, 안 먹어도 돼요.”

“이 녀석아, 괜찮아. 먹어. 자아.”

가운데 아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도 어묵을 먹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양쪽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저희 먹던 대로 열심히 잘 먹었다. 그중 한 아이가 내 눈치를 조금 보는 것 같기는 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억눌린 가운데 아이가 어묵을 힘들게 하나만 먹고는 더 안 먹겠다며 말했다.

“저어, 아저씨, 저 사실 돈 있는데 안 먹고 있었던 거예요.” “응? 무슨 말이야?”

“내일 남자친구한테 초콜릿 사주려고 어묵 안 먹은 거예요.”

“내일이 뭔데? 남자친구 생일이니?”

“밸런타인데인데요.”

“그게 무슨 데이야?”

“킥킥킥킥,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 사주는 날이에요. 죄송해요.”

“아, 아, 야야야, 알겠다, 알겠어. 근데 그게 뭐가 죄송하니? 사랑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참는 거 훌륭한 일이야. 하하하하, 멋진 아이로구나.”

“네?” “좋은 일이라고. 난 괜히 너희들 오해했잖아.”

양쪽 아이들은 가운데 아이가 돈이 없어서 못 사서 먹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 안 사 먹는 거니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양쪽 아이들은 가운데 아이 보란듯이 현재의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다. 나는 낡은 이분법으로 먹는 아이 못 먹는 아이 나누어 못 먹는 아이는 무조건 불쌍한 아이, 저희끼리만 먹는 양쪽 아이는 나쁜 아이들로 보았다. 어묵을 다 먹은 아이들이 나가려다가 돌아서서 나란히 인사를 했다. 괜히 설레발을 친 게 무안했던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하나씩 더 먹어 아저씨가 사줄게.”

그때 가운데 아이가 어묵 두 개 값 1000원짜리를 내게 내밀며 한마디했다.

“아저씨, 저 내일 초콜릿 이 돈 빼고도 사줄 수 있어요.”

나는 망설였다. 돈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것도 한 개 값이 아닌 두 개 값을. 아까처럼 거만하게 소리쳤다.

“근데 왜 두 개 값이냐?” “아저씨가 불쌍해 보여서요.”

“그래? 음…. 알겠다. 그럼 이 돈으로 아저씨는 어묵 두 개 더 먹겠다. 거스름돈은 없다. 잘 가라. 너희들의 욕망, 너희들의 사랑 다 최고다. 얘들아, 그러고 너희들 다음에 여기서 또 만나면 내가 다 쏠게.”

“네, 네, 호호호호, 깔깔깔깔.”

가운데 아이는 겸손하고 그윽하게 한번 나를 돌아보더니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친구들 틈에 끼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500원 벌었다.
2021-02-1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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